Consumer's Journal 프로젝트는 새로운 게 아니다. 온갖 매체로 컨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인터넷 시대에 한 명의 소비자로서 주체성을 유지하자는 취지로 몇 년 전에 시작한 취미다. 다만 정신 건강의 악화로 시종일관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는데, 이제 이 블로그 공간에서 다시는 중단하지 않겠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재개하고자 한다.
세 가지 큰 매체, 즉 음악, 영화, 도서 방면에서 매달 새로 접하는 컨텐츠에 대한 감상문을 포스팅 할 것이다.
나의 채점 체계는 매우 직관적이지만, 두 가지는 부연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B+'라는 표기는 'B+ 혹은 그 이하'를 의미하는 표기로, 내 채점 체계에서 가장 낮은 점수다. 왜 점수를 이렇게 뭉뚱그리냐면 기본적으로 B+ 이하는 타인에게 추천하지 않는다는 공통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그 이상의 분별 작업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Choice Cut은 음악에서만 쓰이는데, ~B+인 앨범에서 유독 돋보이는 곡을 따로 떼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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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에 접한 음악
1. [VA] - Churchical Chants of the Nyabingi [Heartbeat, 1983]
로널드 레이건의 자메이카 방문을 기념해 열린 냐빈지의 현지 녹음. 여기다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 등을 끼얹고 좀 볶아 주면 현대 자메이카 음악이 탄생한다. 다시 말해 이건 아직 조리가 되지 않은 생재료라는 것. ~B+
2. Anthony Braxton - For Alto [Delmark, 1970]
Choice Cut: "To Composer John Cage"
3. [VA] - Memphis Gospel (1927-1929) [Document, 1998]팝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이 풀뿌리 가스펠의 중요성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지만, Document 레코드는 조금의 큐레이팅도 없이 음악을 통째로 싣는 걸로 악명이 자자하다. 총 71분의 무자비한 러닝 타임 속엔 그다지 돋보이지 않는 먼지 쌓인 곡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 넋 나간 뮤지션들이 마치 목숨이라도 걸린 양 정열적으로 박수 치고 노래하는 걸 듣다 보면 종교란 것도 아주 쓸모가 없는 건 아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 ~B+
4. Kink Gong - Chang Fo Ji: Buddha Loops from China & Tibet [Discrepant, 2016]
티베트 불교 신자들은 이렇게 수행한다고 한다. 5~10초 가량의 극히 짧은 불교 노래, 기도 녹음을 무한히 반복 재생하며 명상하는 것. 이는 생로병사의 끝없는 반복, 즉 윤회를 상징한다. 종교적 의미도 심오하지만, 음악적으로 전례 없는 신선한 아이디어, 아직 누구도 선점하지 않은 아이디어임이 분명하다. 영감을 찾아서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탐험할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여기에 주목하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B+
5. [VA] - Memphis Sanctified Jug Bands 1928-1930 [Document, 1994]
가스펠 우물을 파다 보면 피할 수 없이 도착하게 되는 지점. 노래라고 불릴 수 있는 부분은 이젠 별로 존재하지 않고, 그냥 열광에 찬 설교, 샤우팅, 합창, 박수, 아멘이 현기증 나게 뒤섞인 그런 혼합물. ~B+
6. Howlin' Wolf - The Rough Guide to Blues Legends: Howlin' Wolf: Reborn and Remastered [World Music Network, 2012]
울프 디스크 자체야 흥미로울 게 없지만, "Wolf's Inspiration"이라는 제목으로 짜여진 보너스 디스크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로버트 존슨: "Travelling Riverside Blues" (You can squeeze my lemon till/Juice run down my leg), 로버트 나이트호크: "Black Angel Blues" (I've got a sweet black angel/I likes the way she spread her wing)의 적나라한 성적 암시는 전혀 울프스럽지 않다. 이 정도 섹드립에 대적할 만한 생각나는 유일한 울프 가사는 "Back Door Man" (I am a back door man/I am a back door man/Well, the men don't know/But the little girls understand) 정도?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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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에 접한 영화
1. Lois Weber - Shoes [1916]
비록 이성과 손만 닿아도 크나큰 수치인 게 이 작품 시절 세상 모습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몹시 현대적인 느낌이 놀랍게도 이 105년 묵은 영화 속에 존재한다. 어쩌면 그 이유는 작품에서 리얼리즘적 방법론으로 탐구하는 주제가 바로 여성들의 고통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고통의 원인을 직간접적으로 제공하는 남성들은 "잔 다르크의 수난"의 심판관들 같고, 작품 내내 미소조차 보이지 않는 메리 맥라랜은 보급형 마리아 팔코네티 같은 느낌. ~B+
2. Tate Taylor - Get on Up [2014]
상식의 범주에 속해야 하지만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 둘은 루이 암스트롱과 제임스 브라운이라는 것이다. 그보다도 덜 알려진 건 사실 제임스 브라운은 형편없는 사업가에다 심각한 수준의 자기애적 인격 장애를 가진 씨발놈이었다는 것. 영화는 브라운의 수많은 잘못을 그냥 넘기지 않지만 한편으로 그가 이뤄낸 기념비적 업적 또한 화려하게 조명해 입체적인 제임스 브라운을 선보인다: 불우한 걸 넘어 파멸적인 어린 시절에 결코 굴하지 않은 채,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과 여지껏 세상이 본 적 없는 천재성을 밑천으로 음악사를 전광석화처럼 질주한 괴인. 채드윅 보스맨의 브라운 연기는 특히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 그 어려운 브라운의 춤동작을 다 실제로 선보였다고. A-
3. 봉준호 - 기생충 [2019]
"기생충"이 온갖 상을 휩쓸었다고 언론에서 대서특필했던 게 엊그제였는데, 이제 뒤늦게나마 시청해 보니 확실히 대작은 대작이다. 신선하고 훌륭한 아이디어로 출발하면서도 끝까지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전개는 오스카 작품상 값을 한다고밖에. 그렇지만 왜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겐 영화의 작위적 설정, 창피한 조크, 시원찮은 풍자가 짜증을 유발하지 않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여전히 걸작으로 충분히 존중할 만하다고 생각하지만, 내 개인적 취향과는 철저히 상반된 작품. ~B+
4. Orson Welles - Chimes at Midnight [1966]셰익스피어가 왜 영문학의 신으로 추앙받냐면, 그 누구보다도 언어를 기가 막히게 다뤄서 그렇지("이 배는 단정치 못한 여인처럼 물이 질질 새고 있소"), 대단히 특출난 스토리를 선보여서는 아니라는 게 적어도 나의 견해다. 따라서 언어보단 플롯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영화 매체로 셰익스피어를 각색한다는 건 불길할 수밖에 없다. 음질이 구려서 잘 들리지도 않는 대사를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영화라면 더더욱! 솔직히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었지만, 그나마 팔스타프 역 오손 웰스의 독보적 존재감은 인상적이었다. ~B+
5. Todd Phillips - Joker [2019]
비록 호아킨 피닉스가 경악스러운 연기를 펼친다지만, 이 작품에서 진정으로 경악스러운 건 조커의 쉴 새 없는 자기 연민이다. 정신병, 가난과 고독의 삼중고에 시달리는 초반에야 이해하지만, 이미 손에 피를 잔뜩 묻힌 주제에 토크쇼에 나와 사회가 자신을 냉대했다고 칭얼대는 모습은 그저 실소를 유발할 뿐. 한 가지 칭찬할 점: 내가 아는 영화 중 최고의 작품 내 음악 활용. ~B+
6. Orson Welles - Citizen Kane [1941]혼란스럽다. 애초 영화의 엄청난 명성 때문에 작품을 주체적으로 파악하기 험난할 거라 예상은 했지만. 오손 웰스는 확실히 놀라울 정도로 영민하고도 맹렬한 인물이었던 듯하다--영화를 보면 채 5분을 넘기지 않고 꼬박꼬박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문제일지도 모른다--영화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 하기보다는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새기려 하는 데 더 힘을 쏟는다는 느낌을 너무 자주 받았다. 난 시네마에 대해 남들보다 쥐뿔만큼이라도 더 잘 안다고 주장할 자격 따윈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요 작품? 역대 최고의 영화? 글쎄올시다. A-
7. John Ford - The Searchers [1956]
우연인지 뭔지, "시민 케인"과 대척점에 서 있는 영화를 바로 다음에 보게 됐다--워낙에 겸손하게 시작하는 바람에 처음에는 이게 뭐 대단할 게 있는 작품인지 의문을 품기도 했더란다. 하지만 영화는 거의 단 1초도 낭비하지 않으며 시종일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 나간다. 오락 영화가 여기에서 더 나아질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A+
8. Terry Gilliam - Brazil [1985]
전형적인 영국식 영화: 괴이하고, 난해하고, 유치뽕짝. 그리고 코미디라는데 보면서 한 번도 안 웃겼음. ~B+
9. Martin Scorsese - Goodfellas [1990]
스콜세지는 슈퍼히어로 영화는 시네마가 아니라고 했지만, 두 시간 반 동안 싸이코패스 하류인생들의 진부한 범죄의 굴레를 더듬을 바에야 차라리 초능력이라도 연관된 걸 보겠다. 대부 시리즈는 이야기에 신화성을 부여함으로써 위상을 획득했지만, 이건 그저 보기 거북하고 지루한 일대기일 뿐. ~B+10. John Ford - Stagecoach [1939]
내가 이 영화에서 제일 사랑하는 건 역마차를 구성하는 9명의 인물들. 외부의 위협 속에서 마차에 운명을 함께하게 된 개성 뚜렷한 인물들의 교감이 결정적으로 아기가 태어나는 사건에 맞춰 빛나는 모습은 내가 꼽는 작품의 하이라이트. 장르를 서부극이 아니라 로드 무비로 바꿔버린다. 이에 비하면 총격 씬이라든지 의무감에 끼워 넣은 듯한 멜로드라마는 다 부차적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A
11. Robert Eggers - The Lighthouse [2019]
시네마에서 '광기'란 참 다루기 어려운 주제다--어떻게 본질적으로 불가해한 것을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납득시킬 수 있을까? 110분의 러닝 타임동안 습관적으로 방종에 빠지는 이 영화를 심하게 질책하고 싶지 않은 건 이 때문이다. 세상 모든 작품이 1966년 "페르소나"처럼 무궁무진할 수는 없으니까. 모든 걸 알레고리로 치환하려는 손쉬운 유혹에도 조금만 덜 의지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B+이 영화의 극단적인 대중영합주의는 불신자들을 눈곱만큼도 개종시키지 못할 것이고, 예술적 값어치를 조금도 납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영화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선호하는 작품은 파졸리니의 1964년작 "마태복음". 나 같은 탕자로 하여금 실제로 성경책을 들여다보게 만든 작품이 되겠다. ~B+
배경은 1931 프랑스이지만, 그 1931 프랑스가 아니다; 온갖 섬세한 시청각 치장으로 화려하게 수놓인 파리 기차역은 현실보단 환상에 훨씬 밀접한 장소. 이 증강된 현실에서 영화는 너무 오랜 시간을 떠돌기 때문에 작품이 제공하는 모든 즐거움에도 불구, 산만하고 지루했다. ~B+
책은 아직 읽어본 적 없다--항상 그 독특한 제목에 대해 궁금해 하곤 했지만. 하지만 영화는 정말 물건이다. 대중 예술에서 이토록 들끓는 분노와 애타는 연민이 이렇게 효과적으로 표현된 건 극히 드문 사례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을 가볍게 능가하는, 내가 본 최고의 프로파간다 필름. 작품의 사민주의 메시지가 너무 효과적인지라, 위키피디아에서 혹시 1950년대에 영화가 상영 금지됐는지 여부를 찾아보기도 했다. 다행히 그런 기록은 없었다.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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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에 접한 도서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픽션들 [민음사, 2011]
도서 감상문을 적어야겠는데 새 책을 읽기엔 부담스러워서 꼼수를 좀 썼다. "픽션들"은 사실 새롭게 접한 책이 아니다. 그렇지만 감상문을 쓰고 평점을 매기기 위해서 오랜만에 다시 한 번 읽어보긴 했는데, 어휴, 그 충격과 경외, 그리고 재미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았다. 보르헤스의 이지적이고 현학적인 스타일은 자연스레 많은 철학자들과 사상가들의 해석을 유도하지만, 나 같은 일반 독자들에겐 그런 건 오히려 작품에 집중하는 데 훼방이 될 뿐이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은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변은 마냥 겸손 떠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편안한 마음으로 보르헤스가 치밀하게 설계한 미궁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머지않아 방향 감각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길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그 막막함, 절박함. 십분 만끽하길.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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