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21

2010년 1월 23일로 돌아갈 수 있다면

2010년 1월 23일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인생 최초로 자살을 시도했던 날이기 때문이다. 내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모든 사건들의 실타래가 그 날부터 본격적으로 풀리기 시작해 오늘 이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금도 난 심심할 때면 이따금씩 시간을 되감아 그 날로 돌아가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만약 지금의 두뇌를 그대로 간직한 채 그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 . .


1. 당장 정신 병원을 방문해 약부터 먹고, 적절한 치료를 받았을 것이다. 당시엔 내 마음이 이미 골병 들어 있었는지 꿈에도 몰랐다. 특히 긴장 증세가 너무 심해서 견딜 수 없이 괴로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순탄했던 적 없었던 게 내 인생이었기에 무언가가 심각히 어긋났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고3이라면 으레 이 정도는 고생하는 줄 알았다. 더 나아가, 마음의 고통은 나 자신의 의지력과 노력으로 다 이겨낼 수 있을 줄 알았다. 심지어 자살을 기도한 이후에도! 수많은 정신병 환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치명적인 착각을 나 역시 범했던 것이다.


2. 스스로에게 충분한 휴식을 주었을 것이다. 당시 난 너무나 과도하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몰아세운 나머지 정신이 한계에 봉착한 지경이었다. 공부는 더 이상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다. 현상 유지만 했으면 됐다--당해 3월 모의고사에서 전국 50등 안에 들며 정점을 찍을 정도로 공부량은 탄탄히 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실력이 한없이 부족하다 느낀 건 겸양도 정확한 상황 판단도 아닌 내 병적인 자존감 부족 때문이었다. 차라리 못 치렀으면 훨씬 좋았을 시험을 너무 잘 본 까닭에 난 잠시 호흡을 고르며 여태까지의 궤적을 되돌아볼 마지막 기회를 놓쳤고, 이후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정신이 파탄 지경에 빠지며 자연스레 성적은 꾸준히,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3. 반장 직에서 즉각 사임했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수줍고 내성적인 내 성품은 결코 리더 자리에 알맞지 않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에 덜컥 앉게 되자 난 안 받아도 될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이는 졸업하는 날까지 쭉 이어졌다. 생활기록부의 반장 경력 한 줄을 위해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것을 희생했던 것이다.


4. 기숙사에서 절대 퇴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대보다도 더 지독했던 게 기숙사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엄격한 규율과 동류집단압력이 갖는 장점은 있었다. 당초 예상과는 정반대로 집에서의 등하교는 숱한 불편함과 갈등만 낳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가족들은 내 인생에 눈곱만큼도 보탬이 되어 주지 못했다.


5. 적극적으로 외부에서 도움을 구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공부에 뜻을 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난 외부의 도움을 받길 철저히 꺼렸다. 그저 스스로 궁리하고 노력해서 얻는 것만이 참된 성과인 줄 알았다. 자살을 시도한 다음 날에도 나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꽁꽁 숨겼다. 이 몹시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은 잔뜩 억눌린 내 오만함의 또 다른 표출이기도 했다. 친구들, 선생님들에게 "도와 달라" 단 한 마디만 했다면 . . .


그 외 이루 나열하기 힘든 숱한 실책이 지금도 씁쓸하게 눈앞에 아른거린다. 분명 내 인생은 잘 풀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극히 미성숙했던 내 자아에 여러 불가항력적 요소가 겹쳐 12년이 지난 지금,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늙어버린 난 지금도 거듭 후회하고 탄식하며 고통 속에서 세월을 허비하고 있다.

보르헤스는 시간은 셀 수 없이 많은 미래들을 향해 영원히 두 갈래로 갈라진다고 했다. 2010년 1월 23일 그 비극적인 날, 내 목숨은 자살 미수에 그치지 않고 성공적으로 끊어졌을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내 이야기는 17세 생일로부터 세 달 남짓 지난 그 날을 종점으로 돌연히 끝을 맺었을 것이다. 차라리 그 편이 더 나았을까? 아니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더 좋은 걸까? 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마음속을 어지럽힐 때면 난 시간을 되감아 2010년 1월 23일 그 날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내 운명을 결정짓게 되는 모든 사건들의 실타래가 본격적으로 풀리기 시작한 그 끔찍한 날로 돌아가, 이번엔 성공적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길 소망하며 . . .

2021/11/17

어릴 적 구타당한 기억

정리하려 들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바로바로 적어 보자 . . .

●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난 매달 최소 한 번씩, 아마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두들겨 맞았다. 당시 횟수를 세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구타의 강도도 범죄의 영역까진 아닐지언정 꽤 가혹했다--피멍드는 것쯤은 예사였으니까.

● 모든 구타가 그렇듯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 때문에, 잘못이 없으면 어떻게든 구실이 생겨서 맞았다. 스스로 납득하고 맞았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잘못을 납득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잘못에 대한 반성 또한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 얻어 맞은 계기의 70%는 비디오 게임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비디오 게임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열정으로 남아 있지만, 지속된 구타에 난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치부로 여겨 최대한 숨기게 되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비디오 게임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내가 어릴 적과 천지차이로 변했지만 여전히 난 게임을 즐길 땐 남들 몰래 한다. 정신적으로 도저히 당당히 꺼낼 수가 없다.

● 맞을 땐 최소 30분, 최대 1시간 동안 맞았다. 1시간이 넘도록 맞았던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 거의 모든 구타는 아버지에게 당했지만, 어머니도 의도적 방관자이자 적극적 동조자였기 떄문에 역시 나을 것 하나 없다.

● 여러 가지 기억 중 가장 비참하고 치욕스러웠던 구타는 이모와 사촌 동생 앞에서 맞은 것.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벽에 대고 벌을 서고 있었는데, 똑바로 서지 않는다고 머리로 두꺼운 청테이프 뭉치가 날아 왔다. 그때 이모가 뭐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픔은 둘째 치고 그 수군거림, 거기서 느낀 굴욕감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 구타가 끝난 이후엔 난 이불을 덮어쓰고 아픔을 곱씹으며 반드시 복수하겠다, 꼭 죽여버리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다행히 이 원한은 아래 적을 행동 치료를 거치며 상당 부분 해소됐다.

● 구타가 내게 끼친 큰 해로움은 굴종의 버릇이 생긴 것--끝없이 불안해지고, 자꾸만 눈치를 보게 되고, 남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나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희생하게 되고, 부당한 일에도 목소리를 높이길 극히 주저하게 되는 그런 타성. 간단히 말하자면 인성이 비열하고 간사해졌다고 할까, 언제 얻어 맞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 속에서 인격이 형성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 구타가 내게 끼친 또 다른 후유증은 전반적인 자신감 결여, 무력감, 열등감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를 지레 과소평가하게 되고, 가진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이로 인해 살면서 펼치고 싶었던 여러 가지 꿈을 시작도 못한 채 접게 됐다.

● 구타는 내 정신 세계를 상당히 뒤틀리게 만들었다.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난 나보다 약자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가학적으로 굴었던 기억이 있는데, 내 행동은 실은 어릴 적 구타의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한 것이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극심한 불행과 우울증도 많은 부분이 구타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가 얼마나 잠재력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가정폭력으로 그 잠재된 능력의 상당수는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 이상의 모든 후유증은 서른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날 괴롭히고 있으며 아마 죽는 날까지 평생 짊어질 수밖에 없는 천형(天刑)일 것이다.

● 나보다 훨씬 더 심하게, 훨씬 더 자주 얻어 맞고도 부모님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건장하게 자란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많이 들었다. 주로 내게 가해진 폭력이 합리화 되는 과정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가정폭력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는 나는 배포가 좁고 졸렬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난 그렇게 멍청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유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 2011년 정신 병원에 4개월간 입원해 있었다. 당시 행동 치료를 거치며 두뇌에서 구타의 기억을 지우는 법을 배웠고, 그 과정에서 어릴 적부터 쌓인 해묵은 증오도 많이 해소됐다. 그래도 얻어 맞은 기억을 떠올리는 건 지금도 심히 불편하고 괴롭다.

● 병원 치료로 악감정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해자들을 용서했을지라도 구타당한 기억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는다--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점만은 변함없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