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7

어릴 적 구타당한 기억

정리하려 들지 말고 생각나는 대로 바로바로 적어 보자 . . .

●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난 매달 최소 한 번씩, 아마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두들겨 맞았다. 당시 횟수를 세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구타의 강도도 범죄의 영역까진 아닐지언정 꽤 가혹했다--피멍드는 것쯤은 예사였으니까.

● 모든 구타가 그렇듯 잘못이 있으면 그 잘못 때문에, 잘못이 없으면 어떻게든 구실이 생겨서 맞았다. 스스로 납득하고 맞았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잘못을 납득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잘못에 대한 반성 또한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 얻어 맞은 계기의 70%는 비디오 게임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비디오 게임은 그때나 지금이나 나의 열정으로 남아 있지만, 지속된 구타에 난 게임을 즐기는 모습을 치부로 여겨 최대한 숨기게 되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물론 비디오 게임에 대한 세상의 인식은 내가 어릴 적과 천지차이로 변했지만 여전히 난 게임을 즐길 땐 남들 몰래 한다. 정신적으로 도저히 당당히 꺼낼 수가 없다.

● 맞을 땐 최소 30분, 최대 1시간 동안 맞았다. 1시간이 넘도록 맞았던 일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 거의 모든 구타는 아버지에게 당했지만, 어머니도 의도적 방관자이자 적극적 동조자였기 떄문에 역시 나을 것 하나 없다.

● 여러 가지 기억 중 가장 비참하고 치욕스러웠던 구타는 이모와 사촌 동생 앞에서 맞은 것.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벽에 대고 벌을 서고 있었는데, 똑바로 서지 않는다고 머리로 두꺼운 청테이프 뭉치가 날아 왔다. 그때 이모가 뭐라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픔은 둘째 치고 그 수군거림, 거기서 느낀 굴욕감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 구타가 끝난 이후엔 난 이불을 덮어쓰고 아픔을 곱씹으며 반드시 복수하겠다, 꼭 죽여버리겠다고 다짐 또 다짐했다. 다행히 이 원한은 아래 적을 행동 치료를 거치며 상당 부분 해소됐다.

● 구타가 내게 끼친 큰 해로움은 굴종의 버릇이 생긴 것--끝없이 불안해지고, 자꾸만 눈치를 보게 되고, 남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나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희생하게 되고, 부당한 일에도 목소리를 높이길 극히 주저하게 되는 그런 타성. 간단히 말하자면 인성이 비열하고 간사해졌다고 할까, 언제 얻어 맞을지 모른다는 공포와 불안 속에서 인격이 형성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 구타가 내게 끼친 또 다른 후유증은 전반적인 자신감 결여, 무력감, 열등감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를 지레 과소평가하게 되고, 가진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이로 인해 살면서 펼치고 싶었던 여러 가지 꿈을 시작도 못한 채 접게 됐다.

● 구타는 내 정신 세계를 상당히 뒤틀리게 만들었다.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난 나보다 약자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에게 가학적으로 굴었던 기억이 있는데, 내 행동은 실은 어릴 적 구타의 기억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한 것이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극심한 불행과 우울증도 많은 부분이 구타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가 얼마나 잠재력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가정폭력으로 그 잠재된 능력의 상당수는 날아가 버렸을 것이다.

● 이상의 모든 후유증은 서른 가까이 된 지금까지도 날 괴롭히고 있으며 아마 죽는 날까지 평생 짊어질 수밖에 없는 천형(天刑)일 것이다.

● 나보다 훨씬 더 심하게, 훨씬 더 자주 얻어 맞고도 부모님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건장하게 자란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많이 들었다. 주로 내게 가해진 폭력이 합리화 되는 과정에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가정폭력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용서하지도 못하는 나는 배포가 좁고 졸렬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난 그렇게 멍청한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 유도에 넘어가지 않았다.

● 2011년 정신 병원에 4개월간 입원해 있었다. 당시 행동 치료를 거치며 두뇌에서 구타의 기억을 지우는 법을 배웠고, 그 과정에서 어릴 적부터 쌓인 해묵은 증오도 많이 해소됐다. 그래도 얻어 맞은 기억을 떠올리는 건 지금도 심히 불편하고 괴롭다.

● 병원 치료로 악감정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해자들을 용서했을지라도 구타당한 기억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는다--무슨 일이 있어도 이 점만은 변함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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